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스크바 공방전 (문단 편집) === 독일군의 대규모 인사 === 일단 대규모 철수를 승인하기는 하였으나 모스크바로부터 1,500km 밖에 있는 [[동프로이센]]의 기지에서 지도만 보고 있으면, 최후의 목표인 모스크바로부터 마지막 30km만을 남겨둔 채 후퇴하게된 것에 대하여 히틀러는 매우 불쾌해했다. 그러나 당시 독일군은 도저히 공세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진격이 멈춘 지역은 도시나 마을이 아닌 허허벌판이라 추위를 막을 시설이 하나도 없었고 월동시설을 건설할 수도 없었다 물론 이건 후퇴한 지점에서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일단 모스크바에 도달한다면 독일군은 시가전을 치르는 대신 포위한 다음 굶겨죽이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으니 [[스탈린그라드 전투]] 꼴이 나지는 않겠지만 겨울을 어떻게 버틸지는 정말 대책이 없었다. 이후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에 대하여 대규모 인사를 단행했다. 12월 25일 [[하인츠 구데리안|구데리안]]이, 1월 8일에 회프너가 해임되었다. 슈트라우스는 바로 파면되었고, 중부집단군 총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는 히틀러의 압력에 못 이겨 건강을 핑계로 자진사임했다. 한편 독일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발터 폰 브라우히치]]는 이보다 이른 19일에 건강을 이유로 사의를 표했고 히틀러가 이를 받아들여 해임하였으며,[* 실제로 브라우히치는 심장질환으로 여러차례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한동안 병상에서 업무를 봐야했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 후임자를 두고 독일군에서는 여러 명을 물망에 올리고 있었으나 히틀러는 '''스스로''' [[좆문가|육군 총사령관을 겸임하겠다고 나섰다.]] 전후에 많은 장교들은 이것이 프로이센 장교단에 대한 히틀러의 우위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하지만 의외로 그 당시 시점에서는 큰 불만은 없었다. 심지어 히틀러와 이런저런 갈등을 빚었던 [[프란츠 할더]]조차도 브라우히치보다는 히틀러와 손발을 잘 맞출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도의 의외로 건조한 반응이었고 일부에서는 환영하는 반응도 있었다. 다만 국방군 최고사령관인 [[빌헬름 카이텔]]은 의외로 탐탁찮아했는데 이는 기존에 육군 최고사령관이 담당하던 업무의 상당부분을 자신이 떠맡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육군 최고사령관 자리를 차지한 히틀러가 해야할 일이었지만 이 인간이 그렇게 부지런한 인간이 아니라서...] 하지만 정작 진짜로 독단적인 후퇴를 강행한 북부집단군 사령관 레프는 자리를 지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